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놀랐다
미야자키 감독이 이토록 메시지성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줄 몰랐다.
이 작품은 극의 형식을 빌려 '현대의 인간을 바라보는 노인(지성인)의 시선으로 조언하건데, 다음 시대에 태어날 생명을 위해, 지금을 사는 이들은 마중물이 되어 주라' 이야기 한다.
아마도 이를 읽은 사람들 중에는 불쾌하게 느낄 지점이 여럿있었을 것이고, 읽지 못한 사람에게는 몇가지 이야기가 난잡하게 반복되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때는 태평양전쟁 초기
미국의 일본본토 공습으로 도쿄는 불바다가 되고 그날 마히토의 어머니도 화마에 휩싸여 죽게 된다.
마히토와 아버지는 지방으로 거쳐를 옮기게 된다.
그곳에는 마히토의 이모이자 아버지의 새 아내가 살고 있는 외가의 저택이 있었다.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 마히토이기에 지방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고, 집안 돌아가는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히토는.
마침 학우들과 몸싸움을 벌인 날, 귀가도중에 큰 돌을 주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찢는 자해를 벌인다.
마히토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가지 않게 길에서 넘어졌다 둘러대지만, 그의 아버지는 눈이 뒤집어진다. 적어도 수 일간 마히토는 아버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데는 성공한 것이다.
방치된 탑
바로 그즈음. 저택의 수풀 너머 습지에 방치된 탑으로 오라는 알 수 없는 꼬드김을 겪기 시작한다.
마히토는 이 모든 원흉이 저택 마당에 살고 있는 왜가리라 생각하여 왜가리를 사냥하다 탑까지 오게 되는데, 탑의 숨겨진 문이 열려 마히토를 불러들인다.
마히토는 피하지 않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그를 막으려 따라 온 노파, 키리코는 마히토를 필사적으로 말린다.
마히토에게 증조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이 하늘에서 떨어진 석탑을 숨기려 만든 건물이었지만, 건물을 만들기까지 일도 많았고 건물이 완성되고서도 저택에 일이 끊이지 않았다.
탑의 꼬드김도 그런 괴이한 일 중 하나인데.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에게만 들리고 타인은 들을 수 없다.
결국 마히토에게 외할아버지되는 분이 인부들을 시켜 입구를 막고 방차하여 오늘에 이른 것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숨겨진 문이 있었던 것이다.
탑의 정체는 이승과 저승의 출입구였다
여기로 관객을 가둬놓고부터 서사는 이제 메시지로 바뀐다.
주인공 마히토의 한자 뜻을 풀면 '진실한 사람', '올곧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미야자키가 자신의 작품에서 다뤄온 전형적인 인간상이자 페르소나중 하나다.
감독은 '현대인에 대한 견해와 자기-인류의 고해'를 마히토의 입과 몸을 빌려 말한다.
극중 등장하는 사람과 사람같은 짐승들은 세상에서의 인간군상과 세태를 대표하는데, 사람은 사회계층을. 사람같은 짐승은 사회세태의 작은 모형이다.
이들에게 공통적용 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생사법칙이 저승과 이승, 그리고 다시 저승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역할이 그것이다.
단,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갈 때 두 개체가 받는 취급의 차이가 있는데, 사람같은 짐승은 짐승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혹은 짐승 위의 존귀한 존재로 변한다 점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사람-짐승 모두가 꼭 같은 수준의 선악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개개로 보면 추하고, 격이 떨어지거나, 기고만장하고.
집단으로 보면 군집을 이룬 채 조잡-난잡하며 추하다.
행동 기저에는 항시 악이 깔려 있고, 이따금 선을 행한다.
짐승같은 자들일 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하게 표현되며 아예 선이 존재하지 않기까지 한다.
이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란 생명을 형태라는 언어로 다루자면 (서술로 쳤을 때)양태에 따라 갈라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저승에서 마히토는 젊은시절의 키리코와 조우한다
그녀를 통해 저승의 생활을 조금 배우게 된다.
키리코를 따라 물고기를 잡은 날, 그날 밤에 작고 귀여운 생명체 와라와라가 이승에서 아이로 태어나기 위해 승천하는 관경을 보게 된다.
그 관경은 아름다운 장관이지만 어떤 방해도 없이 숭고하게만 진행되지 않는다.
저승에서도 짐승일 뿐인 펠리컨들이 날아와 승천하는 와라와라를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승은 인간이 본 적 없는 세상이지만 '생사법칙은 (저승)전승-이승-저승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될 것'이라 노인(지성체)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
이때 바다에서 불 줄기 하나가 올라오는데, 그 불 줄기가 난장판이 된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흩어지는 불꽃은 아름답지만 사방으로 번진 불씨가 펠리컨과 와라와라까지도 불태우고 있었다.
불을 다루는 신비한 소녀 히미가 나타나 한 일이었다.
펠리컨에게만 해가 가면 좋겠지만 와라와라까지 불타버리니, 마히토는 히미에게 불을 쏘아올리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히미는 불을 다시 쏘아 올리고, 다시 소리치려는 마히토를 키리코가 제지한다.
히미는 필요 충분할 만큼 불꽃을 터뜨리고서야 사라지는데, 그러고도 적지 않은 와라와라가 승천하게 된다.
히미의 개입도 자연법칙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이다.
인간의 개입이 어떻게 생사의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나 싶겠지만, 그건 작품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마히토가 있는 곳은 저승이다.
이곳에서 히미는 큰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녀가 한 일은 자연에 행사하는 인간의 선행이나 개입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레벨의 것이 아니다.
서사적 관점에서 히미, 저승의 지배자, 그리고 마히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다.
혈통과 시간의 순리에 묶여있는 이들이며, 특히 마히토는 저승의 지배자인 증조외할아버지가 지명한 후계자이다.
불속에서 나온 히미. 히미는 사실 마히토의 어머니였다
마히토 앞에 나타난 히미는 펠리컨을 불 태우던 날 마히토가 한 행동을 꾸짖는다.
마히토가 벌인 짓은 젊은이의 치기를 상징한다.
세상의 순리를 모르는 젊은이가 선한 심성을 바탕으로 개입한 것이므로 죄를 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은 공리주의 따위가 아닌 생사법칙과 순리의 행사이므로 히미는 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지성체인 어머니의 관점에서 자식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에서 마히토는 어렴풋이 히미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아차리지만,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럴 밖에...)
이 시점의 히미는 정황상 사정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히토에게 모자관계를 확립시키려 들지 않는다. 이것은 동생의 산실 앞에서도 그렇고.
저승이 붕괴되던 날, 일말의 주저없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자신의 운명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승으로 돌아가면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게 된다
히미는 미야자키 하야오 아니메에 나오는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 상이자,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페르소나지만. 여타 작품과는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는 캐릭터다.
마지막에 저승이 붕괴되던 날,
히미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자신의 시간대로 키리코와 함께 돌아간다.
이 행동은 그녀가 저승 생활을 마치고 이승으로 돌아가 살아가고, 사랑하여, 마히토를 낳아 기르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고 다시 저승으로 가는 짧은 인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승에서 마히토와 함께 하는 동안, 그리고 마지막 날 돌아가는 문 앞에서까지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힘주어 "살아있음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마히토는 증조 외할아버지에게 저승의 지배자의 자리를 두 번 권유받는다
증조 외할아버지는 우리의 세상이 응축하여 낳은 작은 조각 몇개로 아슬아슬한 탑을 쌓고 있다.
탑이 균형을 지키는 동안 우리 세상은 평화롭다.
오늘 하루 분의 일을 마친 증조 외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이 일을 이어 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이를 거절한다. 증조 외할아버지가 탑에 쓴 조각들은 하나같이 악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젊은이의 선한 치기이다. 선한 것, 깨끗한 것, 바른 것, 좋은 것을 원하고 찾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젊은이의 선량이 토해내는 치기.
증조 외할아버지도 그가 쌓은 탑의 조각들이 악한 것들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마히토의 치기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히미와 마찬가지로 마히토를 꾸짖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권유에는 선한 조각들을 내 놓으며 마히토에게 권한다.
그 조각들은 언덕을 이룰 만큼 사방에 널부러진 조각들 가운데, 증조 외할아버지가 찾고 찾은 단 10여개의 조각이었다.
아마도 증조 외할아버지도 마히토가 하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잉꼬대장의 손에 조각이 악으로 더럽혀지고 탑이 되지 못해, 저승이 붕괴되고 세상이 요동칠 것임도 알고 있었을 수 있다.
잉꼬대장이 악의 손으로 선하디 선한 조각으로 탑을 쌓기 전, 마히토는 탑으로도 쓰지 못할 만큼 악한 조각이 언덕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증조 외할아버지 앞에서도 자신은 그 조각을 만져서 안 될 이유로, 마히토 자신도 악함을 고백한다. 그 악의 증거가 관자놀이에 남아있었다.
우리 세계는 지배하는 악과 악의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선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세상을 안다는 의미에는 악과 친교하고 선을 눈감는다는 의미도 있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이를 사랑과 결혼, 전쟁의 협력으로. 노인과 잉꼬, 짐승은 언행으로 이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며. 잉꼬대장은 기고만장함과 무분별함으로 결정타를 날린다.
증조 외할아버지가 쌓은 탑은 이중 마히토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잉꼬대장과 같은 짐승들의 조각으로 하루짜리 평화를 매일같이 쌓고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지금 시대 우리의 사회라는 것은 악 중에 그나마 찾고 찾은 나은 악들을 정점으로-구심으로 하여 탑을 형성해 사회를 형성하고, 시대를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엔 더이상 쓸 조각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고, 구 세대의 왕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다음 세대에게 다음 시대를 맡겨보려 하지만. 새 세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이 악함을 인지하는 지성을 갖춘 세대다.
결국 우리 시대의 평화를 이어갈 기회는
욕심에 미친 악인의 손에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 탑의 모습이 되어 쓰러지면서 재앙을 불러 온다.
작품은 이 슬픈 일이 태평양전쟁과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재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파도가 지나면 평온해진다
풍파라는 재해가 지나가면, 다시 평온이-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은 무서운 말이다.
풍파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말한다.
재앙의 모습이 저승을 뚫고 나온, 말하는 잉꼬가 짐승 잉꼬로 탈화하여 쏟아낸 새 똥-오줌같은 것일 수도 있고, 붕괴되는 저승이나, 젊은 시절의 키리코가 타고 넘겼던 파도와 같을 수 있지만.
앞으로 우리를 찾아올 풍파는 작품속 세계-우리가 아는 지난 반세기 넘는 역사가 보여준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먼저, 감독은 왜 이 세상의 풍파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위에서 누차 돌려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악하며, 그나마 세상이 돌아가고 유지되는 건 그 와중에 구심되고 정점되는 사람들의 선함에 기대 어렵게 지탱되고 있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에겐 무엇을 말하는 걸까? 네가 악하다고 고해성사하라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노인의 지혜로 보건데 마히토.
'진실한 사람', '올곧은 사람'으로 살아 달라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 하루 하루의 삶이 충실해지고, 충실한 삶이 선이 되어 확산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저승의 붕괴때 살아남은 소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살고 혜택을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허상을 쫓는 행위는 사람을 망가뜨린다
환상은 인간성을 놓게 만든다.
올곧은 마히토는 어머니가 살아있을리 없다고 말하며 그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왜가리는 시신을 보았느냐며 마히토를 꾀어내고 마히토는 모두 알고 있지만, 진실을 확인하겠다며 계속 주의와 경계의 촉구로 부터 달아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끝내 하고 만다.
그 결과 마히토는 다시한번 악을 들어내고 화살시위를 웨가리에게 겨누고 만다.
흔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타쿠 비판으로 회자되는 부분의 본질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허상을 쫓는 일의 헛됨과 그 행위가 자신은 물론 인간으로써 추구해야 할 본질적 당연함을 형성-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과정을 이 씬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의 어려움과 숭고함
히미는 마히토가 산실에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은 행동이라 경고만 하고 막지는 않는다.
마히토는 앞서 어머니의 모습을 한 허상에서 보인 것과 같은 행동을 산실 앞에서 벌이고, 급기야 산실을 어지럽혀 자신과 히미를 위기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이 행동은 다시한번 선의의 힘을 빌어 극복하게 되고 나아가서 마히토로 하여금 한층 성숙하게 만드는 결과로.
또, 받아들여야만 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준다.
이는 치기와 함께 젊은이가 하는 실수와 실패를 보여주는 또다른 모습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를 자신의 혼자 힘으로 극복할 수는 없으며,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면서 다 같이 나아가면 된다는 자신의 경험-교훈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실한 사람-올곧은 사람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다시말해, 어떻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미야자키감독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마히토를 통해 미야자키는 젊은 세대가 다르며 기대 걸 수 있는 존재이지만. 불행은 잉꼬대장과 같은 이들의 손으로 찾아올 것이라 말하면서.
관객에게, 젊은이들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다.
이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작품과 같이 말하며 미야자키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하나 하나가 진실한 채로, 올곧은 채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고 이 충실함에 선의를 더하는 한편. 선의가 나에게서 너에게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서 사회로 나아가면 틀림없이 풍파가 지나간 다음엔 좋은 시대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고, 나는 읽었다.
이미지 출처: IGN Movie Trailers. (특전 포스터 제외 이하 동일)
https://youtu.be/UIabnyxTVpc?si=_xO4TjLSrEH87ECg